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조건 항복 (문단 편집) == 사례 == * [[제2차 세계 대전]] 당시 '''[[추축국]]'''들 - [[나치 독일]], [[이탈리아 왕국]], [[일본 제국]]. 이들 중에서 나치 독일이랑 일본 제국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본토가 쑥대밭이 되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며, 이로 인해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. 이 지경까지 간 이유는 이전 [[제1차 세계 대전]]에서 어설프게 [[독일]]과 휴전협상 정도로 종전을 해줬더니 [[배후중상설]]이 불거져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계 대전이 벌어진 관계로 이에 크게 데인 연합군이 다시는 그런 헛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'''무조건 항복하든지 아니면 다 죽든지'''를 내걸고 전쟁에서 패배한 추축국들의 본토에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. 물론 이렇게 본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도 피해가 덜한 지역에서 [[배후중상설]]이 튀어나왔다는 걸 보면 이마저도 부족했다는 평이 나온다. * 627년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Battle_of_the_Trench|한다크 전투]] 당시 [[무함마드]]는 [[메디나]] [[유대인]]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침공하고 이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강요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역사에서 최초로 무조건 항복을 강요한 사례이다.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가 [[국제법]]상에서 정식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일어난 셈.[* 다만 유대인들은 무조건 항복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고, 빡친 무함마드는 그 도시의 모든 남성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. 무함마드의 잔혹함을 들어 깔 때 자주 제시되는 일화이다.] *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도 1814년에 [[동맹군]]에게 [[관광]]당하기 직전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것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. * [[남북전쟁]] - 이 사례는 '무조건 항복'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. 1862년에 남군의 장군이었던 사이먼 B. 버크너(Simon B. Buckner)가[* 이 양반은 '''1823년생'''인데, 아들 [[사이먼 버크너|사이먼 볼리바 버크너 Jr]]. 는 '''1886년생'''으로 '''[[제2차 세계 대전]]''' 당시 육군중장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했다.] 포위군 [[사령관]]인 [[율리시스 S. 그랜트]]에게 휴전 제안을 했으나 '''"'무조건' 만을 항복의 조건으로 인정한다."'''고 응답하였고, 한 신문사가 이를 보도하면서 Unconditional Surrender라는 용어의 소개와 함께 공식 이니셜로 '''[[US]]'''를 제창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. 셔먼 장군 역시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하여 별명이 무조건 장군이었다. [[분류:전쟁]][[분류:조약, 협약, 협정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